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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적 근거 없는 ‘동사목사’, 교인 투표 없는 승계는 무효.

    – 돈줄과 입을 쥔 원로목사, 후임은 그저 꼭두각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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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탄에 주다산교회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이다. 정통개혁주의의 건강한 신학을 표방하는 교회인데 말도 안되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함구하고 있는데.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교회가 죽은 것은 교인이 죽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병든 것은 교인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끄는 리더가 병들었다면 교인이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

    현재 많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은혜’라는 이름의 침묵 뒤에, 법과 원칙을 무너뜨리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평생을 헌신하신 목사님을 예우하는 것과, 교회의 공적 시스템을 사유화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로써 작금의 이 사태를 간과할 수 없다.

    1. 제 110회 총회가 거부한 ‘동사목사’ 제도를 왜 강행 하는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이미 ‘동사목사’ 제도의 신설을 거부했다. 이 제도는 목회 연속성이라는 명분 아래 ‘후임자 길들이기’ 와 ‘기득권 영속화’의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총회가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린 편법을 현재 교회가 주보에 은근슬쩍 올리며 강행하는 것은 총회 결정에 반하는 명백한 ‘불법 사역’이다.

    2. 교인의 주권인 ‘청빙 투표’가 실종되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는 모든 교인이 기도하며 준비하고, 그 의사는 교인 전체의 뜻인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느 기간을 정하여 그 기간동안 특별 말씀 집회를 한다든지, 특별 새벽기도회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수이다. 교회라는 명목으로 모인 단체라면 말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부목사를 어느날 갑자기 ‘동사목사’로 명명하고, 공동의회의 정식 청빙 투표도 없이 담임목사직을 승계시키겠다는 것은 교인들을 거수기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투표절차를 생략한 모든 승계 과정은 법적 효력이 없으며, 향후 교회를 심각한 법적 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것이다.

    3. 재정권과 설교권을 움켜쥔 원로 목사, 이것이 진정한 은퇴인가?

    현재 많은 교회는 은퇴 목사가 재정 장부를 직접 관리하고 설교권까지 독점하는 기이한 구조로 흘러가고 있다. 돈줄과 입을 쥐고 있는 원로목사 아래에서 후임 목사가 무슨 소신으로 목회를 할 수 있겠나? 이는 후임을 사역의 파트너가 아닌 ‘상왕’의 뜻을 수행하는 ‘영적 꼭두각시’로 만드는 일이다. 재정권과 설교권은 마땅히 새롭게 세워질 담임목사와 당회로 온전히 이양되어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 여러분, 특히 주다산 교회 성도 여러분,

    잠시의 소란이 두려워 불의한 관행을 묵인하다면, 이 땅의 교회는 특정 개인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교회에 근거 없는 동사목사 체제를 중단하고, 헌법에 따른 투명한 청빙 투표와 정당한 권한 이양 절차를 밟아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목사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님 앞에 바로 선 ‘공교회’의 일원이기를 원합니다.

  • 기독교의 포커페이스

    요즘 여러 방면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소리가 즐비한다.
    타락을 해도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타락 중 가장 손에 꼽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돈, 성도덕 관련 이슈들이다.
    대형교회를 거머쥐고,
    마치 자신이 그 교회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도대체 목회자의 주머니로 얼마가 들어가야 만족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세습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도무지 그 돈을 거머쥐고 자신의 세대 뿐 아니라 아들 세대에도 그대로 물려주려 한다.
    그것을 옹호하는 교인들에게는 어떠한 보상이 있을 것인가?
    이러한 작태를 그냥 보아 넘기는 교인들은 어떠한 보상을 받은 것인가?
    원로 목사 추대 문제도 이와 관련된다.
    70이 넘어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나이가 되는데,
    언제까지 돈과 권력을 거머쥐려 하는가?
    80,90이 되어서도 생명이 붙어 있는한 돈과 권력에 쌓여 허우적대길 원하는가보다.
    성도덕 관련 이슈는 또 어떠한가?
    젊은 목회자와 청년의 이상야릇한 관계.
    사모가 버젓이 있는데도 상담을 핑계삼아 밤늦은 시간 함께 있다는 것은 납득히 되지 않는다.
    교회 권사님과 모텔을 드나드는 수준은 가히 중세시대 타락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목회자가 욕지거리를 일삼는 일도 있었다.
    한 두번도 아니고 수십년을 상습적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것도 주의 종이라 하는 교역자들에게 행해졌다.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었나보다.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자신의 탐심이 끝도 없이 달해서 생긴 일이다.
    기독교의 포커페이스.
    가면 속 진실은 무엇인가?
    진리는 도대체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기독교 얼굴에 먹칠, 똥칠, 분탕질…
    정말 가면을 벗어던지면 좋겠다.
    이제 정말,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누구를 구원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구원 받은 자인지… 단독자로 서길 바란다.

  • WEA 라는 이름 앞에서 잠시 멈추다…

    이 글은 아직 결론을 내리기 위한 글이 아니다.
    WEA라는 이름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 이유를 기록해 두고 싶었을 뿐이다.
    먼저 WEA는 World Evangelical Alliance 의 약자이다.

    ‘연합’이라는 말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많은 질문을 함께 불러온다.
    무엇을 함께 고백하고, 어디까지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그래서 WEA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쉽게 찬성하거나 반대의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 이름이 담고있는 기대와 부담을 동시에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27일, 사랑의 교회에서 WEA와 관련된 모임이 있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모임은 비교적 긍정적인 의미로 이슈화되었고,
    많은 이들에게는 연합의 가능성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물론 많은 부분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초미의 관심속에서 나 역시 그 소식을 지나치지 않고 바라보게 되었다.
    다만 그 반응은 단순한 공감이나 동의라기보다는,
    앞서 언급했던 질문들이 다시 한 번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경험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생각의 문을 열어보고자 한다.
    즉 WEA라는 이름 앞에서 내가 왜 쉽게 말하지 않게 되는지를 남겨두기로 하자.

    먼저 ‘연합’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종교의 연합이 정말로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너무 쉽게 당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평화를 지향하고 연합을 추구하며,
    이 땅에서 전쟁을 없애고자 하는 취지 자체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다만 그 지향이 반드시 ‘종교의 연합’이라는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쉽게 말하기가 어렵다.
    종교의 다양성, 그리고 특히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성을 지닌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전쟁을 불러온다는 전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연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함께 묶어내고 무엇을 조용히 밀어내는지 먼저 생각한다.
    어쩌면 WEA 앞에서 멈춘다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볍게 말하지 않으려는 나의 태도라고 해두자.
    이러한 멈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쉽게 말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성실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이 공간을 열며…

    이 곳은 생각을 사유하는 소통공간이다.

    이 곳은 완성된 결론을 제시하는 자리라기보다,

    질문 앞에 머무르고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록하는 곳이다.

    말해지기보다 사유되고,

    가르치기보다 함께 생각하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이 글들은 설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

    말씀을 읽다 멈춰 섰던 순간들,

    쉽게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가능한 한 정직하게 남기려 한다.

    확신보다 망설임을,

    결론보다 과정을 기록하는 이유다.

    누군가에게는 동의의 공간이 아니라 반추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빠르게 소비하는 글보다

    천천히 읽히는 문장으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생각을 열어두는 자리로 남고 싶다.

  • Hell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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